휴가나와서 본 08/09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내 생각에 우리의 시즌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는데 두가지 오점이 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그런데 실패한건 아니고 기대치가 좀 높았다. 그래서 우리가 거둔 성공은 묻히기가 쉽고, 특히 오늘과 같이 골라인 앞에서 자빠져버린 날은 더 그렇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겠다. 유나이티드는 굉장히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는 점을.. 아 두가지 오점이 뭐냐고? 하나는 리버풀한테 진거고, 하나는 이렇게 결승에서 완패해버린거지!!!

 전술적으로 분석 들어가는것은 이제 하기 싫다. 완패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런 문장을 두들겨대는 내 심정을 이해해줄 사람은 이 지구상에 그 누구인가? 내 주변에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내가 어떤 한 팀을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제 막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의 어느 저명한 작가가 말하기를 이렇게 자신이 지지하는 팀에 대한 진절머리(?)와 증오심이 치밀어 오를때서야 서포터로서의 성숙도도 올라가는 법이라 했다. 하지만 내게 관심있는 것은 내 자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 기질을 성숙시키는게 아니라, 그저 자유롭지 않은 신분인 내가 새벽에 미칠듯한 졸음을 참아가며 본 이 경기가, 그냥 축구를 좋아하게 된 한 사람의 팬으로서 완전 역사에 남을 재미있는 치고박음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뿐이다. 너무 중요한 경기에서는 그런 상황이 생긴다. 타개할 수 없는 절망감에 몸부림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은 경기시간은 뛰어다녀야 하긴 하는 그런 상황.

 언제나처럼 이성적으로 전술을 걸고 넘어지며 꼬지락꼬지락거리는건 이제는 아예 하기 싫다. 다만 영감님의 안데르손 선발출장이라는, 감전될 걸 알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에 젖은 손으로 콘센트를 붙잡는 그런 선택만을 가슴아파할 뿐이다. 계속해서 내 머리속에 '만약' 이라는 것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데, 예를 들어 플레처가 세스크에게 그 필요 없는 태클을 하지 않고, 퇴장도 안당하고, 결승전에 올라와서 엉덩이에 불붙은 사냥개마냥 우리 중원을 좀 달궈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만약'이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대다수의 맨유 팬들은 바르셀로나의 약점에 희희낙락하면서 이길 수 밖에 없다고 웃음지었지만 그것이 인간의 오만인것을 이제는 깨달았을까. 나 역시 눈돌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플레처나 오언의 공백이, 둘 중 하나가 아비달+알베스+마르퀘즈+앙리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오늘 경기를 다시 똑같은 매치업으로 한다면 맨유가 분명 패배하겠지만, 저 둘 중 하나가 있다면, 이건 해 볼만한 싸움이 아닌가? 따지고보면 알몸으로 컴뱃나이프에 맞선 꼴이지만 맞선 작자만이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몰랐던 꼬라지다. 중원에서 싸움이 이렇게 안될줄은 영감님도 몰랐겠고 안데르손도 몰랐겠지. 그 결과가 이거다. 어떻게 잘 되지 않을까? 라는 심정의 선발 엔트리. 그리고 최악의 교체. 박지성이 빠지는 순간 중립 팬들은 한숨을 흘렸겠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서도 '아 이제 사이드에서도 쳐발릴 것 같아' 같은 구슬픈 불안함에 내심 떨어야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알기 쉽게 돌아왔다.

 내가 영감이라도 그러겠지만, 왜 루니가 아닌 지성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축구는 결과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땐 그럴 수 밖에 없었지라고 이해하면서도 '젠장 내가 감독했으면 이렇게 했겠어' 하는 비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법이기도 하니까. 누가 비난하랴? 결과를 보고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을. 그러나 이 세상은 세이브와 로드가 안된다. 예견했어야 했다. 우리는 실리를 취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베스와 아비달이 없다는 점이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음을, 이렇게 경기가 끝나고나서 깨달으면 안됬던거다..

 이제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유나이티드의 패배에 대해 조롱하겠지만 나로선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가슴에 난 생채기에 타바스코를 찍어다 꾹꾹 펴바르면서도 씁쓸히 웃어넘길 수 밖에 없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에 차라리 후련하지만, 나를 놀리겠다는 마음으로 섣불리 그 화제를 내게 반드시 들이댈 몇명의 사람(특히 부대 안에서)은 지금 심정같아선 구타유발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 자중해줬으면 좋겠고, 오후에 내가 복귀할때까지 내 감정의 정리가 완전히 되서, 리버풀전 패배로 다져진 내 가슴의 굳건함이 어설픈 도발에 말려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지만

 난 아마 또 도발에 넘어갈 것이다.

 그런 내가 너무 싫다. 그리고, 이 절망적인 기분을 나눌 어떤 사람도, 지금시각 AM 0603. 없다. 내 주변에.

 그게 너무 싫다. 내겐 지금 너무 필요하다. 이 아픔을 나눠가져줄 사람이. 에휴~ 하고 함께 한숨쉬어줄만한 사람이...

 이렇게 가끔 당하는 패배 속에서 언제나 나는 다른 팀의 서포터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바람기에 잔뜩 젖어보곤 한다. 오늘도 그렇다. 난 너무나도 에스파뇰과 비야레알을 서포팅하고 싶단 말이다!!! 그 기분이 결코, 너무도 강한 유나이티드를 향한 반발심이 아니길 빌지만, 사실 약간 그렇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틈날때마다 비야레알에 대한 정보를 찾아봐야겠다. 한동안, 적어도 프리시즌이라는게 시작할 때 까지는 이놈의 패배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기를 빈다. 울렁증, 어서 떠나라. 내 우울함까지 가지고 떠나다오. 날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달란 말이다..

 그래도, 여태껏 우리가 품고 있던 문제점들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우승은 해내니까, 이겨나가니까. 못본척 하고 있었던거다. 그걸 이렇게 패배한 후에 신난다~ 하고 비난하고 나서는건, 비겁한 것 같다. 막말로 그건 응원하는게 아니잖아. 대리만족을 위한 비난이지.. 선수들을 물갈이해야한다 이런 말은 너무 심하다. 다 적재적소의 사용용도(!?)가 있는건데! 그러니까 오늘 내가 안데르손을 향해 푸념하는건 괜찮다. (?)

아무튼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시겠어요.

다음시즌엔 더 강해지리라.

by 미치엔 | 2009/05/28 06:06 | # 日記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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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반쪽달 at 2009/05/28 07:21
제 블로그에 방문을 해주셔서 저 또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경기는 정말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던 것과 다르게 경기가 흘러가서 놀랐습니다.
특히 맨유팬분들에게는 큰 심리적 타격을 받으실 수 있는 경기였던 것 같네요.
(저도 바르셀로나를 응원했지만, 우승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하지않을까 생각했었다죠)

맨유는 최고의 강팀중 하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것 이라는게
다른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정말 두렵지만, 제가 응원하는 팀과 내년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나서
좋은 경기를 하기를 기대해야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응원하는 팀은 AC밀란 이랍니다~;;
Commented by 미치엔 at 2009/05/28 08:56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구단과 마주치는 모든 상대가 다 너무 매력적인 클럽들 뿐이라 차라리 갈아타버릴까 하고 고민에 빠져있는 주인장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죠. 밀란 응원하신다구요.. 밀란도 내년에는 보다 나은 모습으로 유럽 무대에서 전통의 강호 이미지를 되찾을 수 있기를 함께 기원해드리겠습니다.

오늘 결승은 참 뭐랄까...

복잡한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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